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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타임즈’ 정우진 회장의 금의환향

08/06/2002

by 이광윤의 (태권도 세상)

 

38년전의  은인을  찾은  정우진  회장이  감격의  포옹을  하고  있다

 

세계화 된 ‘태권도의 금자탑’을 태권도인들 스스로가 흠집내는 꼴불견이 연출되는 작금의 현실에 태권도의 정도를 걸어 온 한 재미 태권도인의 ‘금의환향’이 감동을 주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8월 3일 오후 4시, 세종문화회관 대연회장에서 열렸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린다(행림출판)’의 ‘출판기념회’의 저자 정우진(태권도 타임즈) 회장이 그 주인공 이다.

‘정스 태권도 아카데미’회장, ‘뉴 라이프 휘트니스 월드’회장, ‘마운틴 탑 코퍼레이션’회장, ‘트라이 마운트 퍼블릭-태권도 타임즈’회장, ‘그랜드마스터 오너 소사이어티’이사장, ‘북한 태권도 성지’ 건설위원장, ‘대한민국 평화통일 자문위원’ 등의 직함이 반증 하듯, 1971년 빈손(단돈 35달러)으로 미국에 이민 갔던 정우진의 ‘출판기념회’는 단순히 거물급 태권도인의 의례적인 ‘출판기념회’가 아니었다.

 

출판기념회  기념식

 

그의 ‘금의환향’은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태권도를 통한 ‘해외 이민 성공사’도 아니며, 자신을 과시 하기 위한 ‘출판기념회’도 아니다.

38년전, 어려웠던 고학도 시절, 자신에게 학비를 대준 은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보은의 이벤트’ 인 것이다.

“5년전 수소문 끝에 김효신 선생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술 한병으로 감사 드리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서 이런 자리를 마련 했습니다.” 38년전 공장 근로자로 일하며,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던 가난한 정우진에게 선뜻 대학 등록금을 대준 사장님. 정우진 회장은 38년전의 은인인 김효신 사장을 상석에 모시고, ‘출판기념회’의 주인공 이라고 흠숭했다.

당시 거금의 등록금을 전달했던 삼두기업의 김효신 회장은 정작 그날의 선행을 기억치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평생을 남을 돕는 삶을 살았던 김효신 회장의 좌우명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였으니, ”자신의 선행을 기억치 못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측근들의 귀띔이었다.

이 날 출판기념회는 정우진 회장이 김효신 선생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황금에 눈이 멀어 혈육도 배반하는 세태에 사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는 가슴 뭉클한 감동의 드라마 그 자체였다.

 

김효신  회장  38년전, 정우진  회장의  고학시절  등록금을  내  준  김효신 (삼두기업) 사장

 

출판기념회의 분위기가 마치, ‘TV는 사랑을 싣고’ 같은 분위기로 흐르고 있을 때, 조선족 출신으로 중국 국영회사의 사장으로 있는 권원칠 박사가 연단에 섰다.

권 박사는 “지난 1992년 사업을 시작했을 때, 북경의 오주호텔에서 정우진 회장을 처음 만났다”면서 당시, 호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투숙비가 싼 호텔을 묻는 정 회장의 일화를 소개 하면서 “그 때부터 인연이 되어 늘 검소한 정 회장의 삶을 지켜 볼 수 있었다”고 술회 하면서 “지금도 자신이 나태해 질 때면, 정 회장의 삶이 자신의 지표가 된다“고 역설했다.

감동과 눈물로 어우러진 이 날 행사는 정우진 회장의 모교 인 울산 청양초등학교 제26회 졸업생(동창생) 25명이 참석, 동창생 정우진 회장의 금의환향을 축하하는 기념사진을 촬영 하면서 막을 내렸다.

취재를 마치고, 행사장을 빠져 나오는 기자에게 한 중진 태권도인이 팔목을 잡았다. “38년전의 은인을 찾는 정신, 졸업 49년만에 초등학교 동창회들을 찾는 정우진 회장의 넉넉함, 이 모든 게 태권도의 정신입니다. 미국 사람들 아니, 세계인들이 그 정신에 매혹되어 태권도를 배우고 있습니다.” 기자의 팔목을 잡은 사람은 ‘주한 미국인’이었다.

 

졸업  49년만의  재회  정우진  회장의  모교  동창생들 (울산  청양초등학교  26회  졸업생들)

 

태권도 타임즈 정우진 회장의 삶

 

정우진은 1943년 경남 울주군 청량면 개곡리에서 5남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던 열다섯 살에 집을 나와 부산에서 경남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때, 처음으로 태권도를 접하게 된다.

정우진은 고교 졸업 후,서울로 올라와 콩나물 장수, 철공소 근로자 등을 전전하다가 공업사 근로자로 취직한다. 이 때 입주 가정교사, 태권도 사범 등을 하며 고학으로 한양대학교 기계과를 졸업 하였다.

월남전 참전과 대학 마친 후, 보험 외판원을 전전하면서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한 때,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으나, 오뚜기처럼 재기에 성공한다. 이 무렵 소규모 택시회사와 타이어 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나 1960년대의 암울한 한국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는 정우진에게 참혹한 패배의 좌절감을 안겼다. 좌절의 수렁에서 그는 새로운 곳을 바라보게 되는 전기를 마련한다.

1971년 단돈 35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아이오와주 시더래피즈시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주유소 펌프맨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73년에 처음으로 흑인 빈민가에 태권도장을 열었다. 이후, 그는 파죽지세의 성공을 거두며, 산하 지관을 45개로 도장을 확대하면서 16만명의 제자를 배출하는 태권도 대부로 성장했다.

1979년에는 동양인으로는 이례적으로 헬스사업에 진출하여, ‘뉴 라이프 휘트니스 월드’의 회장이 되었다. 미국 중남부 전역으로 8개 사업장을 개장 하였고, 회원 2만명을 확보하였다.

또 마운틴 탑 코퍼레이션을 설립하여 백화점과 오피스빌딩 임대업에 진출 하였고, 중국에 진출하여 12개 헬스클럽 오픈을 목표로 현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태권도 해외 보급 사업에 관심을 기울여, 세계 120개국에 배포되는 영문태권도 잡지 ‘태권도 타임즈’의 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해외 무도인들을 위한 무도연금 ‘그랜드마스터 오너 소사이어티’를 설립 하기도 했다.

아울러, 콜로라도 주 록키산맥 정상에 ‘태권도연구소’인 ‘이글 네스트’를 설립 하였으며, 북한 나진 선봉지구에 100만평 규모의 세계적인 ‘태권도 성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주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상’과 미국 정부에서 주는 ‘중소기업인상’과 아이오와 경제 개발 ‘공로상’을 받았다.

현재 ‘정스 태권도 아카데미’회장, ‘뉴 라이프 휘트니스 월드’회장, ‘마운틴 탑 코퍼레이션’회장, ‘트라이 마운트 퍼블릭-태권도 타임즈’회장, ‘그랜드마스터 오너 소사이어티’이사장, ‘북한 태권도 성지’ 건설위원장, ‘대한민국 평화통일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 이광윤